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르투갈 왕국 (문단 편집) ==== [[나폴레옹 전쟁]]에 휘말린 포르투갈 ==== 1793년 [[루이 16세]]가 혁명 세력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각국의 국왕들은 대 프랑스 동맹을 맺고 [[프랑스 혁명]]을 진압하려 했다. 포르투갈 정부 역시 7월 25일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9월 26일 영국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대 프랑스 동맹에 가담했다. 이후 피레네 전선에 6,000명의 포르투갈군이 파견되었지만 큰 활약은 하지 못했다. 1795년 7월 22일 스페인과 프랑스간의 평화 협약인 바젤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포르투갈 역시 프랑스와 평화 협약을 맺으려 했으나 포르투갈이 경제적, 군사적으로 의존하는 영국의 압력이 가해지자 어쩔 수 없이 포기했다. 이후 포르투갈은 프랑스와 무력 충돌을 벌이지 않으면서도 공식적으로 화해하지도 않는 어쩡쩡한 상태로 남았다. 1799년 7월 14일, 주앙은 비로소 섭정에 취임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프랑스의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포르투갈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스페인과 동맹을 맺은 뒤 포르투갈에 "영국과 손을 끊고 프랑스-스페인 동맹과 손잡지 않는다면 무력으로 응징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주앙이 거부하자, 스페인의 총리 마누엘 데 고도이는 나폴레옹의 권고에 따라 포르투갈을 침공해 올리벤사 등 일부 영토를 공략했다. 이후 엘바스를 공격하려 했다가 프란시스쿠 드 노로냐 장군이 지휘하는 포르투갈 수비대에게 격퇴당한 뒤 철수했고, 양국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럼에도 고도이는 엘바스 외곽에서 오렌지를 가져와서 마리아 1세에게 리스본으로 가겠다는 메시지와 함께 보냈다. 그래서 이 전쟁은 "오렌지 전쟁"이라는 명칭으로 일컬어졌다. 1801년 6월 6일 포르투갈은 영국 선박에 항구를 폐쇄하고 프랑스에 상업적 특권을 제공하고 올리벤사를 스페인에게 양도하며, 스페인은 그 대가로 철수한다는 내용의 바다호스 협약을 체결했다. 영국은 이에 대응해 1801년 7월 윌리엄 헨리 클린턴 대령 휘하의 3,500 병력을 파견해 북대서양에 있는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섬을 점령했다. 이들은 1802년 아미앵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그곳에 주둔했다. 또한 1801년 9월 29일 포르투갈령 [[기아나]]의 절반을 프랑스에 양도하는 대가로 프랑스와 평화 협약을 맺는다는 내용의 마드리드 조약이 체결되었다. 1805년, 아내 [[카를로타 호아키나|카를로타]]가 남편을 섭정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이 섭정이 되려다 발각되어 켈루스 궁전에 유폐되었다. 이후 주앙은 코임브라 대학교 출신이며 [[자유주의]] 성향을 갖춘 정치가 및 지식인들을 끌어들여 자기 편으로 포섭하고자 노력했으며, 학자들의 권고에 따라 여러 과학 탐험을 조직하고 식민지의 잠재력과 사회 및 경제에 관한 광범위한 조사를 실시했다. 이 시기에 설립된 왕립 해양 학회(Royal Sociedade Maritima)는 포르투갈 제국의 지리와 해상 및 수로를 담음 지도 제작을 담당했고, 아르코 두 세고 문학관은 농업, 제조, 과학 및 예술에 관한 고급 연구의 제작 및 출판을 담당했다. 그러나 자유주의를 못마땅하게 여긴 보수 성향의 인사들이 대거 반발했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주의 성향의 정책은 매우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포르투갈은 전통적으로 영국에 우호적이었지만, 영국이 마데이라 섬을 점거하고 인도에서의 포르투갈인들의 활동을 제약하자 포르투갈 궁정 내에서 프랑스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주앙은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나 영국 중 한 국가와 갈라섰다가는 친 영국파나 친 프랑스파가 이반해 나라가 위태로워질 거라 여기고, 할 수 있는 한 두 나라에게 잘못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1802년에 체결된 [[아미앵 조약]]이 파기되고 프랑스와 영국이 전쟁을 재개했을 때 영국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도, 영국 국왕 [[조지 3세]]에게 밀사를 보내 "프랑스의 협박 때문에 부득이 전쟁을 선포했지만 영국에 적대행위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안심하라"고 알렸다. 1805년 영국 함대가 프랑스-스페인 연합 함대를 상대로 [[트라팔가 해전]]에서 완승을 거두자, 주앙은 즉시 영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관계를 회복했다. 이듬해 나폴레옹이 [[대륙 봉쇄령]]을 반포하면서 포르투갈에 이를 따를 것을 요구하자, 영국과의 무역에 의존하는 자국 상황에 대륙 봉쇄령에 동참하는 것은 자살 행위라고 여겨 거부했다. 이에 나폴레옹은 바다호스 협약이 파기되었다고 선언하고 고도이와 협의해 양국이 포르투갈을 양분하는 대가로 스페인군의 지원을 받아냈다. 1807년 말 [[장앙도슈 쥐노]]가 이끄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7,000명이 포르투갈을 전격 침공했다. 포르투갈 정부는 이 소식에 발칵 뒤집혔다. 일부 인사들은 영국과 연합하여 프랑스에 대항하자고 주장했고, 또다른 인사들은 프랑스에게 항복하고 영국과 관게를 끊자고 주장했다. 그러던 11월 16일 영국 함대가 리스본 항구에 도착했다. 그들은 왕실을 브라질로 호위할 의향이 있지만, 프랑스와 손잡는다면 리스본을 무력으로 장악하겠다고 통보했다. 주앙은 국론이 분열되고 군대는 프랑스에 비하면 지극히 미약한 상황에서 프랑스와 맞서는 것은 무리라고 여겼고, 그렇다고 영국을 적대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는 고심 끝에 영국 함대에 몸을 싣고 브라질로 피신하기로 마음먹었다. [[파일:포르투갈 왕실의 브라질 망명.png]] 1807년 11월 29일, 주앙과 왕실 인사들, 고위 관료들과 하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인파가 영국 함대 15척에 몸을 실었다. 그는 왕국의 무결성과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지만 부득이 브라질로 망명할 수 밖에 없다며, 자신이 떠난 뒤에도 질서를 유지하며 피를 헛되이 흘리지 말고 침략자들에게 저항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내용의 포스터를 거리 곳곳에 붙이게 했다. 그는 아들 [[페드루 1세(브라질)|페드루]], [[미겔 1세|미겔]]과 함께 한 배에 올라탔고, 아내 [[카를로타 호아키나|카를로타]]와 다른 딸들을 다른 2척의 배에 태웠다. 그와 함께 승선한 사람들의 수는 분명하지 않다. 19세기에는 최대 3만 명이 그를 따라갔다는 이야기가 대두되었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4,000명에서 7,000명 사이일 것으로 추정한다. 이들이 몸을 실은 배들은 하나같이 수많은 승객과 짐이 가득 실린 [[과적]] 상태였으며, 승객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잠을 자야 했고 곳곳에 배설물이 쌓였다. 갈아입을 옷조차 챙겨오지 못하다보니 [[머릿니]]가 들끓는 등 위생 상태가 지극히 나빴고 많은 이들이 병에 걸렸다. 또한 보급품이 부족해서 배급이 실시되었다. 게다가 항해 내내 무더위에 시달려야 했고, 2번의 폭풍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남미에 근접할 무렵, 주앙은 본래 [[리우데자네이루|히우지자네이루]]에 곧바로 가려던 계획을 변경해 바히아의 살바도르를 먼저 들리기로 했다. 이는 브라질 최초의 중심지였다가 히우지자네이루에게 그 지위를 잃은 뒤 민심이 흉흉했던 이들을 달래기 위한 조치였다. 다만 다른 배들은 원래 목적지인 [[리우데자네이루|히우지자네이루]]로 향했다. 1808년 1월 22일, 주앙의 배와 다른 2척이 살바도르에 도착했다. 브라질 식민 행정관을 맡고 있던 폰테 백작 주앙 드 살다냐 다 가마 멜루 토레스 게데스 브리투는 시민들에게 섭정 왕세자의 명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마중나오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그들이 도착했을 때 부두는 텅 비어 있었다. 주앙은 고된 여정에 시달린 귀족들이 회복할 수 있도록 하선을 다음 날로 미뤘다. 이튿날 배에서 내린 주앙은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경의를 표하고자 찾아온 모든 이들이 베자마오(beija-mão: 군주의 손등에 입맞춤하는 의식)를 행하는 것을 허락했다. 실바도르 총독부에 입성한 후, 주앙은 식민지 주민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경제학과 외교학과 학교를 독자적으로 설립하는 것을 허락하고, 우호적인 국가에 대한 항구 개방을 용인하며, 마리아 1세가 포르투갈의 섬유업이 위협받는 것을 막기 위해 식민지인들이 섬유품을 개별적으로 생산하여 해외에 판매하는 것을 금지한 <1785년 헌장>을 폐지한다고 선언했다. 실바도르 시민들은 이를 열렬히 환영하는 한편, 왕실을 위한 호화로운 궁전을 짓겠으니 이곳에 계속 머물러달라고 요청했다. 주앙은 자신을 정성껏 영접하는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도 히우지자네이루에서 통치를 하겠다고 분명히 밝힌 뒤 그 곳을 떠났다. 히우지자네이루 시민들은 3월 8일에 도착한 주앙을 위해 9일간의 축하 행사를 거행했다. 그 후 포르투갈 왕실은 히우지자네이루를 새 수도로 삼고 총독의 대저택에 임시로 머물다가 상인 엘리아스 안토니우 로페스가 마련한 별장으로 이주했고, 몇 차례의 확장을 거치면서 훗날 브라질의 역대 통치자들이 기거하게 될 파코 드 상 크리스토방 궁전이 세워졌다. 그러나 왕실 자제와 귀족들을 만족시킬 만한 집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카르모 수녀원 외 수많은 주택들이 몰수되고 주인들은 푼돈을 받고 쫓겨났다. 한편 주앙과 사이가 극도로 좋지 않았던 카를로타 왕세자비(훗날 왕비)는 보타포고 해변 농장에 머물렀다. 당시 약 6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던 히우지자네이루는 포르투갈의 귀족들이 한꺼번에 모여들면서 크게 달라졌다. 상인들은 사치품을 포함해서 귀족들이 만족할 만한 식품 및 기타 소비재 공급을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고, 귀족들을 위한 수많은 새 거주지 및 기타 건물이 수 년간 건설되었으며, 서비스 및 기반 시설이 대폭 개선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전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내게 된 주민들은 차츰 포르투갈 왕실과 귀족들에게 불만을 품었다. [[파일:주앙 6세의 궁정에서 거행된 손키스 행사.jpg]] 주앙 6세의 궁정에서 거행된 손키스 행사 풍자화 주앙은 시민들의 불만을 눈치채고 그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포르투갈에서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손키스 의식을 히우지자네이루에서도 주기적으로 실시했다.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한 날마다 귀족과 평민이 섞인 긴 줄이 섭정 왕세자의 거처에 늘어섰고, 주앙은 그들 한 사람씩 대면하여 손등을 내밀면서 따뜻한 말을 건넸다. 브라질 화가 엔히크 레베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왕세자는 어떤 사람을 위로하고 또다른 이들을 격려했다. 왕세자는 천박한 매너, 촌스러운 말투, 쓸데없는 고집, 장황한 언사 등 그 어떤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군주라기보다 아버지처럼 민중을 대했다." 브라질 작가 및 역사가 마누에우 지 올리베이라 리마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자신을 만나러 온 자들의 얼굴이나 탄원을 혼동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삶과 가족, 심지어 과거에 발생한 작은 사실을 언급해 그들 모두를 놀라게 했다." 주앙은 브라질에 머무는 동안 많은 기관과 공공 서비스의 창설을 공식화하고 경제, 문화, 예술 및 기타 국가 생활 영역을 촉진했다. 그는 많은 브라질인을 왕실 비서로 고용하고, 언론 및 제조 시설의 설치를 허가하고, 새로운 농업 문화를 도입했다. 또한 [[종교재판소]]의 폐해를 인정하고 더 이상 종교재판을 열지 못하게 했으며, 도로를 개선하고, 여러 학급, 학교 및 공립 아카데미를 만들고, 과학 연구를 장려하고, 공공 행정을 조직했다. 이 모든 조치는 이러한 자원이 없었던 식민지를 관리해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시행된 것이었지만, 브라질이 독자적인 국가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주앙이 포르투갈을 떠났을 때 포르투갈에 남겨둔 섭정위원회는 프랑스군의 공세에 별다른 저항없이 항복했다. 쥐노의 프랑스군은 포르투갈을 행군하는 동안 막대한 비전투 손실을 입었던 터라 리스본을 가차없이 약탈했다. 그 바람에 리스본의 많은 역사적 명소가 파괴되었으며, 리스본 시내의 식량은 사라지고 화폐 가치가 폭락했으며, 환전소와 사업체는 문을 닫았다. 그 후 쥐노는 군사 정부를 수립한 뒤 나폴레옹 1세의 명령에 따라 포르투갈 군인을 대거 징발해 독일에 주둔한 프랑스군에 파견했으며, 모든 지방 행정직과 치안관에 프랑스인을 임명했다. 포르투갈인들은 이에 분노해 리스본에서 여러 차례 무력 시위를 벌였지만 그때마다 가차없이 진압되었다. 많은 포르투갈인이 내륙의 외딴 지역으로 숨거나 영국 등 해외로 피신했지만, 이들 대부분은 약탈과 몰수로 재산을 잃었다. 런던의 포르투갈 대사는 영국 국왕 [[조지 3세]]에게 약 2만 가량의 주민만이 리스본에 남아있으며 그나마도 거의 모두가 굶주리고 있다며 포르투갈을 구원해달라고 호소했다. 포르투갈인들은 프랑스의 폭압적인 정책에 분노해 전국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파로와 포르투에 2개의 의회가 수립되었고, 각지에서 별도의 지방 의회가 세워져서 행정망이 개편되었다. 쥐노는 이를 진압하기엔 병력이 부족하고 자기가 출진했다가 리스본에서 반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해 리스본에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1808년 8월 [[아서 웰즐리]]가 이끄는 영국군이 포르투갈에 상륙해 쥐노를 여러 차례 격파했다. 이에 쥐노는 아서 웰즐리의 뒤를 이어 부임한 영국 장군들과 협상한 끝에 포르투갈에서 물러나는 대신 영국 수송선에 약탈품과 함께 탑승하여 프랑스로 수송된다는 내용의 산트라 협약을 체결하고 포르투갈을 떠났다. 1809년 1월 2일 지방 총독들의 기능과 권한이 정해졌고 포르투갈 재무부는 브라질에서 임명된 왕립 재무부 장관에 종속되었다. 그 해 3월 프랑스군이 포르투갈 북부를 침공했지만 영국 장군 윌리엄 베레스포드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후 포르투갈군이 재편되어 영국군과 합류해 프랑스군의 연이은 침략을 격퇴하고 아서 웰즐리가 [[이베리아 반도 전쟁]]을 치르는 기반이 되어줬다. 한편 브라질에 있던 주앙은 프랑스에 전쟁을 정식으로 선포하고 [[프랑스령 기아나]]를 공략했다가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부르봉 왕조가 복귀하자 프랑스에 돌려줬다. 그러나 포르투갈의 상황은 프랑스군의 위협 외의 다른 이유로도 위험해졌다. 지방 총독들은 섭정 왕세자가 자신들에게 부과한 권한으로는 외부의 적에 대한 효율적인 방어를 할 수 없으며, 동요하는 시민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또한 왕실이 자신들을 버리고 브라질로 망명한 것에 대한 민중의 반감이 매우 강했고, 자유주의자들은 이 때를 틈타 [[주앙 5세]]부터 이어지는 [[절대군주제]]를 '자유군주제'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앙은 이에 대응해 언론과 비밀 결사에 검열을 가해 선동적인 사상의 유포를 억제하려 했고, 알로마 후작 페드루 드 아르마다를 "프랑스주의"를 설파하는 등 왕실에 불손한 언행을 했다는 이유로 추방하고 모든 직함과 특권을 박탈했다. 또한 지방 총독들의 호소에 따라 1809년 8월 30일 그들의 권한을 확대해 군주의 허락을 따로 받지 않고도 임의로 군대를 이끌고 시민들을 통제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로도 무질서해진 사회를 통제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고, 포르투갈 경제는 붕괴 직전까지 내몰렸다. 포르투갈은 전쟁 기간인 1807년에서 1814년 사이에 전체 인구의 1/6을 전쟁, 기근, 질병, 실종 등의 요인으로 상실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